작성일 | 2015.03.20 | 조회수 | 507 |
---|
|
|
종두법의 창시자인 제너(Jenner)의 스승이면서 미국 벤저민 프랭클린의 주치의였던 존 헌터(John Hunter)라는 사람이 있다. 1700년대 사람으로 당시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했던 소위 이발사외과(Barber-Surgeon) 시절에 외과학을 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헌터 박사는 끊임없는 동물실험을 통해 해부학을 배웠고, 사람의 해부를 하기 위해 도굴꾼과 밀거래를 통해 바로 사망한 사람의 사체를 다시 파내서 해부를 배웠다고 알려진 사람이다. 질병의 원인을 밝히고 치료를 위해 얼마나 헌신적 희생을 했는지는 그 당시에 유행한 매독과 임질의 임상 양상과 치료법을 알려고 환자의 고름을 본인에게 직접 주입해 임질과 매독의 진행과정을 연구하는 등 본인의 희생을 통해 의학을 발전시킨 대표적인 의학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다.
협심증이나 심근경색증 진단에 필수적인 심혈관 조영술이라는 심장 정밀검사법이 있다. 이 심장조영술을 위해서는 카테터를 혈관을 통해 심장내로 삽입해야 하는데 현재는 이러한 방법이 매일 실시되고 있지만 의학 초창기에는 심장내로 이물질을 넣어서 검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그런 시도를 한 의사는 의사들에게서조차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처음으로 '제중원'(1885년)이라는 병원이 설립된 후, 즉 한국의 근대 개화기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의료선교사들과 초창기 의사선배들을 보면 그들은 인술의 화신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역만리 타향에서 한국인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독립운동까지 마다하지 아니했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본인이 질병에 걸려 죽기까지 하면서 희생을 했다. 의사는 어떤 면에서는 성직자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치료한다는 점이 같을 것이다. 의사는 사람의 질병을 다루고 성직자는 영혼의 질병을 다룬다. 두 직업 모두 봉사정신이 기본 바탕에 있어야 한다. 의사나 성직자가 자기가 선호하는 사람만 치료할 수 있는가? 나쁜 사람이나 좋은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치료해야 한다. 심지어 전쟁 중일 때는 적군일지라도 환자를 보면 치료해야 하며 이것이 거룩한 선행이라고 배운다. 성직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듯 의사들이나 성직자들은 상대방의 성향을 불문하고 정성을 다해서 치료해야 하는 봉사정신을 가져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두 직업 모두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자본주의 물결 속에 의술도 필요할 때 돈을 주면 사고파는 상품처럼 변질이 되기도 했지만 본질 적으로 의사라는 직업은 성직자처럼 태생 자체가 육체적 정신적 질병을 가진 환자를 치료하는 인술을 베푸는데 전념해야 하고 부자가 되거나 권력을 가지는 속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의협에서 원격진료와 기요틴 법안들에 대한 대정부 투쟁을 선언했다. 존경을 받아야 할 의사가 길거리로 나서야 하고 투쟁을 해야 하는 최근의 사태를 보면서 마음이 아프다. 여기에서 왜 이러한 투쟁이 시작됐고 그 과정이 어떠한가를 논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의사들도 인술을 거슬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과감히 시정을 해야겠지만 의료의 본질인 '인술'을 의사가 펼칠 수 있는 환경은 정부가 먼저 만들어 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의료인들은 정부와 환자 앞에서 소위 '을'의 입장에 서 있다. 응급환자가 있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에게 달려가야 하고 가난한 환자라고 치료를 거부할 수도 없다. 양심있는 의사가 그 양심에 근거해 환자를 치료할 때 보람이 있어야 한다. 의사의 마음속에 분노를 간직하게 하는 정책은 결국 환자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의업의 본질인 '봉사와 희생'의 바탕 위에 '인술'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환자들의 사랑을 받는 의사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